첫인상과는 다르게 – 그녀는 큰 키와 밝고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어 눈길이 간다 – 한식을 엄청 좋아해요. 주변에서도 저에게 파스타나 와인을 좋아할 것 같다고 얘기하지만, 제 취향은 김치찌개나 김밥에 더 가까워요. 제 큰 키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때부터였어요. 그전까는 늘 위축되어 있었어요.
만약 학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아이였는지를 물어본다면 존재감이 없는 아이라고 말했을거예요. 그 이유에는 가정환경이라던지 여러 가지가 있었죠. 지금에서는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어렸을 때는 그러할 힘이 별로 없잖아요. 늘 스스로 위축되어 있던 거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위축되어 있었고, 그랬기에 늘 소극적이었어요. 지금도 제 기질은 남아있어요.
이번 자서전 프로젝트에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만들어가는 방법’ 사업의 첫 단계로 시민참여 워크숍 프로그램을 개최했었고, 이곳의 참여를 통해 자서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하는 것에 호기심이 확 생겨도 "제가 할게요"라는 말을 쉽게 못 꺼내고 있는거예요. 계속 망설이다가 프로그램이 끝날 때 즈음이 되어서야 말할 수 있었죠. 오늘날에서야 이 정도도 용기가 생긴거죠. 어렸을 때는 그 기회를 계속 놓쳐왔어요. 소극적이여서 마음속 말을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거죠. 심지어 성인이 되었어도 식당에서 맛있는 반찬을 몇 번이고 더 시켜 먹고 싶어도, "반찬 좀 더 주세요"라고 여쭙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그랬던 제가 어떤 계기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개선이 되었어요. 제 성향 자체가 자율적으로 뭔가를 시도하기보다는 누가 시키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오히려 학교 다닐 때 조회나 종례처럼 정해진 틀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유롭게 수강하고 집에 오는 그 자유로움이 오히려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또 하나의 모순적인게 있다면, 저는 보기보다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해요. 막내라서 그랬는지, 어릴 땐 정말 많이 울었어요. 고등학생까지는 매해 새로운 학년으로 진급하면 친구들이 바뀌는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학년이 바뀌면 그렇게 맨날 울었어요. 신학기 초가 되면 짝꿍이 바뀐다고 울어댔죠. 짝꿍이 바뀌는 것도 싫고, 새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때는 오히려 빨리 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대학교는 4년 동안 친구가 안 바뀔 테니까 좀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어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환경이 저에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어요. 저는 1남 4녀 중 막내였는데, 늘 제 안에 그 환경이 일종의 '상처'처럼 남아 있었어요. 제 언니들이 “너는 그게(가정환경) 그렇게 상처였어?” 라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막내라면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집안의 경제적인 얘기를 자주 꺼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녜요. 그래서 언니가 저한테 이상하다고 했죠.
아무도 나에게 경제적인 것과 관련해 한 번이라도 압력을 주거나 돈을 아끼라고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뭐 사줄까?” 하면 “괜찮다”고, “안 먹고 싶다”고 답했었어요. 언니들은 돈이 생기면 바로 쓰는 스타일이었는데, 저는 세뱃돈을 받았다 하면 2년이고 3년이고 안 쓰고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에는 언니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다 써버리게 되었지만요. 그때부터 길러지던 생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저는 언니들이랑은 달랐어요. 성향은 비슷한데 생각은 좀 달랐던 거 같아요. 5남매이다 보니 큰언니하고는 꽤 나이 차이가 나지만 넷째 언니와는 조금밖에 차이가 안 나요. 큰언니부터 작은언니까지 사이가 너무 좋았어요. 원래 자식들은 부모님 사랑을 더 받고 싶은 마음에 서로 질투하잖아요. 물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바로 위 언니가 날 너무 미워했고, 무섭기도 했어서 사이가 좋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일 친해졌죠.
계기가 있다면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어머니께서 슈퍼우먼처럼 사시는 모습을 제가 늘 보아왔다는 거예요. 늘 바쁘셨지만 저희에게는 단 한 번도 부담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대단한 점이에요. 보통은 어머니가 바쁘고 하면 큰아이가 집에서 밥을 한다든가 아니면 동생들을 전담한다던가 등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되잖아요. 근데 우리집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자식들만큼은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저희에게 일체 맡기지 않으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대장부 같은 사람이었어요. 저희 집이 광주 시내에 있었는데, 시내에 산다는 것은 도시에 사는 것이니 시골에서 오신 친척분들은 우리집을 자주 왔었죠. 마치 제가 서울에 올라가면 기거할 곳이 없어서 친척집에 가는 것과 같아요. 당연하게 광주 시내로 올라오시면 코스처럼 우리 집으로 와 계셨고 우리 어머니가 다 건사하였죠. 그러다보니 대가족과 같은 느낌으로 살았었어요. 우리 집에 누군가가 꼭 와 있거나 아니면 친척들이 와서 누군가와 일을 같이 하고 있거나 그랬죠. 사촌 오빠들은 다 우리 집을 다 거쳐갔을 거예요.
제 아버지가 공부를 좀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광주 시내로 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 쪽 친척분들과의 연락을 단절하지 않고 계속 이어왔어요.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는 그런 어머니가 가끔 불이익을 받는 것처럼 느낄때도 있었어요.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길에서 깡패들이 약자를 괴롭히는 걸 보면 직접 가서 말리기도 하세요. 너무 무섭지 않나요?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걸 해왔던 사람이에요. 근데 저도 닮아가는 건지 불의를 보면 못 참았겠어요. 많이 당하고 나서야 저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참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비교해도 사랑이 참 많았어요. 막내여서도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그게 제 안에 남아 있어요. 어머니가 늘 가족을 따뜻하게 챙기셨고, 언니들도 저를 많이 감싸줬어요.